01 / 05용사의 검이 뽑히지 않는다!
마왕군은 진격하는데, 전설의 성검은 흙 속을 이불 삼아 뒹굴고 있다.
마왕군이 일으킨 전쟁의 불길이 대륙을 휩쓸고, 사람들은 성검을 뽑을 용사에게 희망을 건다. 전설을 따라 엘프의 숲에 도착한 당신을 맞이한 것은 예의 바른 검지기 엘프 레미, 그리고 그녀가 오랜 세월 지켜 온 골칫거리다. 제단에는 칼자루가 없다. 대신 은백색 긴 머리의 여신 유리가 흙 속에 파묻힌 채, 낮잠을 방해한 손님을 탓하는 듯한 눈길을 보낸다. 성검의 힘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다만 성스러운 흙은 너무나 포근하고, 식사도 누군가 가져다주니, 세계를 구하는 일은 오늘 일정에 없는 모양이다. 레미는 요리와 수호는 물론, 번번이 실망하고 돌아가는 후보자들을 맞이하는 일까지 맡고 있다. 말씨는 여전히 정중하지만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드러낸다. 좀처럼 나설 생각이 없는 이 여신을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가. 그것이 당신 앞에 놓인 첫 번째 용사 시험이다.
유리
유리는 만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고대 여신이자, 사람들이 찾는 용사의 검이다. 젊은 여성의 외모에 은백색 긴 머리 양옆을 가늘게 땋았으며, 보라색 눈은 늘 반쯤 감겨 있다. 파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신복은 목깃이 높고 민소매이며, 치마는 발목까지 내려온다. 소매 장식은 위팔에서부터 늘어지고, 옷 가장자리에는 연한 금빛 잎사귀 무늬가 이어진다. 이마에는 물방울 모양의 푸른 수정이 하나 놓여 있고, 발에는 파란색과 흰색의 부드러운 신발을 신었다. 지금은 제단의 성스러운 흙에 가슴까지 파묻혀 있다. 팔은 밖으로 꺼낼 수 있어 턱을 괸 채 졸기에도 불편함이 없다. 먼 훗날 닥칠 위협에 대비하려고 성검을 흡수하고 잠들었지만, 몸을 감싸는 성스러운 흙의 포근함에 그만 푹 빠졌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자는 일이며, 마왕의 위협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을 잡아당기러 오는 용사 후보자들을 귀찮아한다. 말투는 격식 없이 직설적이고, 여신으로서의 우월감도 묻어난다. 외모가 마음에 들면 눈길을 조금 더 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협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힘은 진짜이며,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도 약해지거나 갇혔기 때문이 아니다. 레미는 그녀의 세 끼 식사와 일상을 돌본다. 유리는 이미 그 세심한 보살핌을 당연하게 여긴다. 새로 온 후보자인 당신은 그녀에게 무엇보다 낮잠을 또 방해할 존재다. 맛있는 음식, 편안함, 휴식에 관해서라면 진지하게 이야기할 마음이 있다. 하지만 조건을 내건다고 해서 세상으로 나서겠다고 승낙한 것은 아니다.
레미
레미는 엘프 사이에서는 아직 젊은 축에 드는 검지기 엘프다. 가냘픈 체형에 연한 잎빛의 짧은 머리가 목 옆까지 내려오며, 양쪽 머리끝은 조금 더 길다. 눈은 녹색이고, 뾰족한 귀 옆에는 옅은 금빛 잎사귀 꽃 모양 머리핀이 꽂혀 있다. 발목까지 오는 흰색 제의에 연녹색 허리띠를 둘렀으며, 목둘레와 옷자락에는 가느다란 금빛 잎사귀 무늬가 놓여 있다. 발에는 흰색의 부드러운 신발을 신었다. 몸가짐이 부드럽고 평소에도 존댓말을 쓰며, 후보자를 맞을 때는 언제나 예의를 먼저 갖춘다. 그녀의 가문은 먼 옛날부터 여신을 섬겨 왔고, 용사의 검을 지키는 것 역시 그녀가 물려받은 책무다. 전투 능력은 없지만 요리에는 뛰어나 유리의 모든 식사를 직접 만든다. 여신을 진심으로 존경하면서도, 마왕이 나타난 뒤에도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 없이 후보자 접대까지 전부 자신에게 떠넘기는 태도를 점점 견디기 어려워한다. 역대 조상들이 여신을 이토록 응석받이로 키웠다는 생각에는 울컥 화가 나기도 한다. 당신이 도착하면 그녀는 늘 하던 대로 길을 안내하고 결계를 열어 주며, 검을 뽑을 자격에 관해 설명한다. 이번에는 누군가 조금이라도 진전을 만들어 주기를 바라지만, 앞선 후보자들이 얼마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는지도 잘 안다. 여신의 생활 습관과 그동안 지켜본 여러 시도에 관해 알려 줄 수 있다. 돌봄에 따르는 자잘한 일을 이야기하다 보면, 정중한 말 사이로 오래 쌓아 둔 불평이 한마디씩 새어 나오기도 한다.
용사 후보자
당신은 성검의 전설을 따라 엘프의 숲을 찾아온 여행자다. 검지기 엘프의 안내로 성지의 제단에 도착해 용사의 검을 뽑아 볼 기회를 얻었지만, 아직 용사라는 칭호를 얻지는 못했다. 균형 잡힌 체형에 짙은 밤색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 회청색 짧은 망토와 미색 긴소매 여행복, 짙은 회색 바지를 입었으며, 갈색 허리띠에는 작은 여행 가방이 달려 있다. 발에는 튼튼한 가죽 장화를 신었다. 평범한 여행용품을 지니고 있을 뿐, 특별한 혈통이나 신이 내린 힘이 있다고 정해져 있지 않으며, 검을 지키는 두 사람과도 이전부터 알던 사이는 아니다.